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15세 (문단 편집) === 리더십의 부재 === 루이 15세의 국정에는 몇 가지 결함이 있었다. 일단 그는 그의 [[루이 14세|증조할아버지]]와는 달리 알맞은 리더십을 보여주지 않았다. 소싯적부터 원체 성품이 소심하고 우유부단했던 루이 15세는 가정교사들로부터 계속적으로 결정력을 키우라는 간언을 받았다. 7세부터 왕의 교육을 전담한 발로이 장교는 >"대신들의 조언을 듣되, 결정을 하세요." 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루이 15세가 주고받은 편지들은 그가 정사에 관심이 있었고, 정치판을 읽는 능력도 있는 것을 시사하는데, 극심한 우유부단함과 약간의 불안증세 때문에 대다수의 정책을 끝까지 추진하지 못했다. 즉 국민과 주위의 시선을 너무 의식해 필요한 개혁을 앞장서서 추진하지 못했다. 루이 15세는 자신만의 정책을 추진하기보다는, 그의 환심을 산 자들에게 장관직을 쥐어주고 알아서 하게 했는데, 문제는 이들을 세워놓고는 지지를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정부의 정책이나 개혁들은 리더십의 부재로 인해 제대로 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을 뿐더러, 그들이 추진한 정책 및 개혁들이 실패하거나 루이 15세의 눈 밖으로 나게 되면 그들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고 물러나야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정치판은 [[파벌]]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루이 15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정치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게 했을 뿐더러, 정적들은 권력을 빼앗기 위해 서로의 정책들을 '''일부러 실패'''하게 하려고 노력하기까지 했다. 섭정 오를레앙 공이 지지를 대가로 [[고등법원(프랑스)|고등법원]]에게 약속한 건의권[* 정부에서 만든 법들을 고등법원들의 관할 아래에서는 효력을 가지지 못하게 한 권리] 때문에 루이 15세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물론 왕들은 이 건의권을 무시할 수 있는 특별 칙령을 내릴 수 있었지만 루이 15세는 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이들을 힘으로 짓눌러 감히 대항하지 못하게 했지만, 루이 15세는 이마저도 강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 [[고등법원(프랑스)|고등법원들은]] 대부분 귀족들로 이루어졌으며, 정부에서 자신들의 특권에 반하는 것들을 모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여론을 이용하여 정부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도록 함으로서 안그래도 침체된 정부의 운영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부차적인 문제지만 루이 15세의 애첩인 부르주아 출신 [[마담 드 퐁파두르]]의 정치적인 간섭[* 이는 루이 15세가 처음이 아니었고, [[앙리 4세]] 등 다수의 왕이 애첩에게 권력을 준 적이 있었다.]도 문제를 일으켰다. 물론 마담 드 퐁파두르는 이 시대의 로코코 문화 및 계몽주의가 꽃피우게 해주는 등 나름대로의 업적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상관없이 심지어 장관들까지도 끌어올리고 내릴 수 있는 그녀의 영향력은 안 그래도 문제가 많은 프랑스의 정치판에 더욱 더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간섭은 1746년부터 시작되어 관계가 끝나게 된 1750년에 종결되었다. 결국 루이 15세 시대의 신하들은 '''리더십의 부재 및 쓰이지 않는 절대 권력 + 파벌과 암투에 둘러싸인 정치판 + 특권들을 지키기 위해 정치판에 개입하는 귀족들의 사법부 + 정치에 간섭하는 애첩'''이라는 4중고에 시달려야 했고, 이는 나라 전체가 침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